가을에 기억해야 할 것들
가족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 살아있는 지옥을 선택한 이들이 또 다시 맞이한 가을. 우리에겐 여전히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추모해야 할 죽음들이 있다. 지겹다는 말은 소용이 없다. 정말 질리는 건 끊이지 않는 사고 소식과 동일한 패턴의 책임 회피,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들이 미안해하는 사회를 그저 방관하며 이웃의 상실에 위로의 꽃 한 송이조차 전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한탄일 뿐이다.
2022년 11월 24일, 늦가을이라기엔 아직 따뜻했고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모 언론사의 이태원 참사 취재 시사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불이 켜진 인쇄소가 드문드문 보이는 충무로 골목을 걸으며 딱 이 정도의 평화로움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고민했다.
대형 참사의 반복에 대한 피로감과 그 어떤 반성의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현실에 화가 치밀었다가도, 어느새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교통상황처럼 관련 뉴스를 듣는다. 나는 이 뉴스 너머의 광경을 아주 잘 안다. 한 날 한 시에 사람들이 죽고, 장례식장이 북적이고, 유가족들이 울며 기자회견을 한다. 한 쪽에선 어른들이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다른 한 쪽에선 죽음을 조롱하고 그것을 전시한다. 사고 지점 부근에는 빨간 글씨로 쓰인 호소의 현수막들이 가로수마다 걸리고, 그 현수막들은 길어지는 추모에 먹고 살기가 힘들다며 나타난 상인들의 칼에 의해 찢어진다. 그 어떤 아름다운 봉합의 예는 볼 수가 없다. 그저 대립 또 대립이다.
길을 걷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158명이나. 참사로부터 파생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은 개인의 반성은 힘이 세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점점 방어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젊은이들의 태도는 죄가 없다. 가방문이 열렸다는 말조차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예민함은 더 이상 그저 개인의 기질에 기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키겠다는 과도한 적대감은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한 경험의 축적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출퇴근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의 주춤하던 발걸음을 기억한다. 꽉 찬 차량 안에 가득 들어찬 얼굴을 알 수 없는 팔과 다리들을 보며 느꼈던 묘한 숨막힘이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참사의 기시감을 느낀다. 오늘 죽지 않기 위한 긴장과 노력은 늘 평범한 시민들의 몫이 된다.
공권력의 개입 없이 질서를 확립하는 사회가 온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국가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의 이야기다. “일방통행”이라는 안내 하나가 없어 백 명이 넘는 사람이 길 위에서 죽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출산율을 걱정하기 전에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지키라는 비아냥은 이제 진지한 아젠다가 됐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에너지바로 저녁을 때우며 참사의 진상을 보고 듣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관심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혹여 젊은이들이 상처입어 사회를 신뢰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그런 어른들. 내가 목격한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평범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의 걱정과 고민으로 이 사회의 오늘은 만들어진다.
언젠가 거친 언행이 물리적 폭력이 되는 것을 막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건 주요한 압박이 된다. 그러니 이 촛불같은 관심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길을 걷다 멈추고 분명하게 경고해야 한다. 나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어제의 비극은 언제든 나의,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일이 될 수 있으니. 그리고 이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오래된 경험에 의한 씁쓸한 고찰이다.
1029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각각 천국과 평안이 찾아오기를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