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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기록

블루가 아닌 인디고 _ RM <Indigo> 감상 후기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의 한 폭에 들어간 듯한 앨범 재킷을 들고 나온 RM. 앨범의 이름은 Indigo, 그의 첫 공식 음반이다. 온갖 '최초'의 커리어를 쌓은 그가 온전히 스스로의 몫으로 만든 '첫' 수식어다. 그런 그가 지난 20대의 기록이라며 세상에 내놓은 푸른 쪽빛의 모음은 과연 어떤 파장을 가졌는지 경건한 자세와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보았다.

 


1. Yun (with Erykah Badu)

   그는 왜 윤형근 화백의 작품을 좋아할까? 처음엔 그저 취향이겠거니 했는데 음악까지 만들어 리스펙하는 모습에 진지하게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트랙으로 인해 윤형근 선생님의 작품을 찾아보고, 그의 삶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기까지가 다 그의 계획이었다. 

 

2. Still Life (with Anderson .Paak)

   Still Life, <정물>이란 뜻이며 보통 무제의 정물화-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그린 그림-에 붙은 영문 이름. 이 글자의 뜻을 처음 알았을 때 Still(고요) + Life(생명) 라는 상반되는 두 단어의 조합이 이질적이면서도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화자인 RM은 그런 단어의 의미를 전시된 자신의 삶에 빗대었다. 언뜻 정물화처럼 보이는 그의 삶이 실은 생동하는 생의 한 장면임을 꽤나 쿨한 어조로 외친다. 그래도 삶, 여전히 삶. 

 

3. All Day (with TABLO)

   에픽하이의 <Fly>에 냉소를 한 스푼 더한 듯한 느낌의 노래. 가사를 보면 리듬마저 음악이 아닌 다른 것에 빼앗겨버린 뮤지션의 허무함이 묻어난다. 곡의 막바지에는 땅에 두 발을 온전히 디디고 하루를 보내기도 벅찬 삶이 날갯짓을 위한 발돋움처럼 느껴진다. 괜히 그런 희망이 차오른다. 

 

4. 건망증 (with 김사월)

   순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순수한 가사에 미소가 지어진다. 공원을 걷고, 그 안에서 풀냄새를 통해 노스탤지어를 찾고, 그 추억의 향에 취해 겨우 며칠은 더 살아가는 현실을 마치 가벼운 산책을 하듯이 노래한다. 

 

5. Closer (with Paul Blanco & Mahalia)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만 했던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6. Change pt.2

   직설적인 가사와 대비되어 예측 불가능하고 화려한 전개를 가진 세련된 음악이다. 중간에 피아노 선율의 드라마틱한 등장과 전환이 그가 겪은 변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Pt.3, Pt.4도 기대하게 되는 트랙.

 

7. Lonely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유명인들이 넓은 집을 사는 이유에 대해 집 밖의 사적 공간이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을 메우기 위함이라는 말은 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사적 공간'을 잃어버린 그에게 작은 호텔 방은 그저 사방이 막힌 무인도 같은 느낌이었을 터. RM은 아주 주관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 감정을 <외로움>이라는 글자로 노래한다.

 

8. Hectic (with Colde)

   외국어를 배움에 있어 장점은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상태를 하나의 단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본인 삶의 단편을 대표하는 듯한 단어로 지은 'Hectic'은 도시의 삶 속에서 느끼는 반복되는 찰나를 음미한다. 술에 취해 탄 택시 안에서 영사되는 지겨운 클리셰들을 곱씹다가 탄생한 노래라니. 이런 술주정은 대환영이다.

 

9. 들꽃놀이 (with 조유진)

   난폭한 기억들로부터 잠식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의 어느 날들을 상상하게 한다. 거대해지다 못해 비약하는 생각과 걱정을 표방한 의견들로부터 자신만의 정체성을 획득하기-혹은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엄마의 카톡 프로필 배경 같이 조금은 촌스러우나 왠지 계속 들여다보게 되고 어느새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들꽃. 그런 들꽃 같은 삶. 작고 보잘것없는 캐릭터의 들꽃을 한데 모아 큰 불놀이의 이미지로 치환시킨 그의 시도는 마치 인간 김남준이 방탄소년단 RM으로서의 삶을 포용하는 어떤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0. No.2 (with 박지윤)

   저항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되는 박지윤의 목소리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니.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니.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잠언의 어느 구절처럼 다가와 가슴 한 구석을 노크하듯 두드리더니 그 공명이 아주 오래 울려 퍼진다. 특히 후렴구의 초반 소절 뒤에 붙는 허밍이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연말의 캐럴이 될 것 같다. 

 


RM의 <Indigo>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조와 희망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런 아이러니함이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 과연 인생이다. 그의 전작인 믹스테입 <mono.>에서는 최대한 단조로운 색깔로 그 소용돌이들을 칠했다면 이번엔 걸음과 환경에 따라 자연스레 만들어진 워싱이 그대로 드러나는 방법을 택했다. 오직 인간과 자연만이 영감이 되어준다는 현재 그의 모습이 'Indigo'라는 컬러를 닮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온전히 빼닮은 이 푸른 한 묶음의 편지를 겨울 내내 읽고 또 읽을 작정이다.

여전히 인간 김남준과 가수 RM으로서의 간극이 너무 크지 않길 바라지만서도 그 안에서 충돌하며 찾아내는 보석 같은 음표들을 기대한다. 그의 팬으로서, 그의 용기로써.